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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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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들어가다

어느 혹부리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집을 찾는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 날이 저물고, 무서운 마음을 떨치고자 노래를 흥얼거리다 도깨비를 만난다.

할아버지의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던 도깨비들은 흥겨운 노래의 비결이라 여겨지는 할아버지의 혹을 떼어가고 대신에

마술 같은 도깨비 방망이를 선물한다. 할아버지는 로또라도 맞은 듯 골칫덩어리 혹을 개운하게 제거 받고 횡재한다.

또 다른 혹부리 할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같은 산을 찾는다.

그러나 화난 도깨비들에게 되레 혹을 하나 더 붙여주는 시술을 받고선 가슴을 치며 하산한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행운을 거머쥔 첫 번째 할아버지 같은 잭팟(jack pot)이 내 팔자에 있지 않을 바에야

두 번째 할아버지처럼 도전이라도 해봐야 할 일이다. 되레 혹이 둘이 될지라도 그 산에 한번 가볼 걸 그랬어 하며

평생 곱0(금지단어라 0처리함)으며 사느니 도깨비를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하는 게 낫다.

대신 상이나 몰매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떨어지는 결과물에 만족할 각오라야 한다.

애시당초 혹이란 것 자체가 없는 인생도 있을 터,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희 아일랜드 호와 긴 여행 함께 해주신 승객 여러분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저희 배는 백령도, 백령도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시는 물건이 없도록…….”

 

멍하던 수경의 표정은 배 안을 울려대는 안내방송과 조바심 나게 부스럭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소란 덕분에

다시 초점을 찾을 수 있었다. 목적지를 앞두고 속도를 줄인 배는 수경을 괴롭게 만들었다. 온몸이 배의 움직임에 맥없이 동요되고 있었으며

그럴 때엔 어김없이 몸 안에 축적해둔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솟구쳐 오를 것만 같았다. 수경은 힘주어 침을 삼켰다.

 

백령도, 백령도분명 백령도라고 했다.

우리나라 서해 최북단 섬. 인천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네 시간 반 정도 달려야 만날 수 있는 곳.

결국 내가 이곳에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수경은 자신이 행선지를 제대로 고른 것인가 아주 짧은 순간 고민했다.

혹을 떼려면 산으로 갈 것이지 섬이 웬 말인가 말이다.

 

, 오늘은 힘들었어. 무슨 날씨가 이 모양이야?”

뭐 이 정도 가지고 수선이야? 우리 조업 나갈 때 생각하면 뭐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까?”

그래도 오늘은 이상하게 뱅뱅 돌더란 말이지. 조업 나갈 때야 멀미 느낄 새가 어딨어?

그런데 이건 하는 일 없이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몇 시간씩 앉아있으려니까 좀 쑤시지, 멀미나지 아주 죽겠어.

오늘은 파도도 왜 이렇게 심한 거야? 에고, 괴롭다 참말로. 그러고 보면 예전엔 어떻게 다녔을까 몰라?

그땐 쾌속선이 어딨어? 열 시간, 열두 시간. 그걸 어떻게 탔을까 몰라? 세상 좋아졌지. 지금 그거 다시 타라면 타겠어, 어디?”

수경 옆, 오십 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명이 부산스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열두 시간이라하루의 절반을 배를 탄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어쩌다 여행 한번 온 뱃길도 아니고, 근무지로 들고 나감에 그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가혹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근무했을 선배 간호장교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쾌속선이 수경보다 이 서해바다에 더 먼저 와주었음을 수경은 마음 깊이 감사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배가 온전히 멈추기도 전에 부산스레 짐을 챙기는 사람들 틈에 수경은 정지해있는 영상이라도 되는 듯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게으른 걸까? 지친 걸까? 당황한 걸까?

배도 감정이 있다면 이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 바다에 배를 깔고 달리고 싶진 않았을 것이라고 수경은 생각했다.

지금은 20021월 중순의 추운 겨울이다. 그래서였을까? 점심 먹고 출발한 배가 사방이 깜깜해진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평소보다 두 시간 가까이 더 걸린 셈이고, 안내방송에 따르면 높은 파도 때문이라고 했다.

수경은 배가 겨울 바다 울렁증에 걸린 탓일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 바다에 배를 깔고 달려야 했던 가여운 덩어리여, 너에게 생명이 부여되지 않음이 차라리 다행이리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버스 배기가스 냄새만큼이나 적응 안 되는 배 안의 기름 냄새. 물 표면에 닿아있는 건지,

공기 중에 떠 있는 건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선체. 그리고 새로 근무하게 될 미지의 그곳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더해 혹을 떼게 될지 도리어 두 개를 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까지. 이건 유쾌하지 않은 도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수경 스스로는 고립을 무척이나 원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왕래가 닿지 않는 고립은 정신적 고립 또한 유발할 것이며

그 고립의 끝엔 영혼의 안식이 있으리란 공인되지 않은 이론이 수경의 이번 발령을 나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짐을 챙겨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배를 내렸다. 큰 짐은 미리 택배로 보냈었기 때문에 지지 못할 짐은 없어 다행이라고 수경은 생각했다.

지금 져야 할 짐이 많았다면 첫 입도가 구차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모습으로 이 섬에 첫발을 내딛고 싶진 정말이지 않았었다고 수경은 또 생각했다.

 

배를 내린 순간 생각지 못한 상황에 짐짓 당황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섬의 윤곽을 어림이라도 잡아볼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이 온통 깜깜했고, 불빛이라곤 마중 나온 차량들이 밝혀주는 해드라이트가 전부였다.

차가 여러 대라 서로 교차하는 불빛들로 인해 차량 인근 상당 부분 시야가 확보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규모나 범위를 알아내기에는 턱없는 조명이었다.

미국 훈련 때, 시력교정렌즈 없이 방독면을 쓰고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야가 흐리자 귀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교관의 지시사항이 몇 마일은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수경은 생각했었다.

보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는구나 하고. 말이 안 되는 얘긴 줄 알지만, 지금의 이 어둠은 또 다른 감각기관 어딘가를 마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경아!”

 

-본문 중에서-